울릉도에 도착해서 첫하루의 관광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예약해 둔 대아 리조트로 왔다.
육지와 울릉도 사이를 잇는 유일한 배편을 운행하는 대아 해운에서
몇년 전 울릉도에 설치한 숙박시설인 대아 리조트는
이 섬에서 가장 깨끗하고 시설이 좋은 숙소라고 한다.
우선 본관에 들러 방을 배정받았다.
우리 가족은 산중턱에 지어진 별관 중 한 채에 머무르게 되었다.
언덕을 올라갈 때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저절로 움직이는 계단이
열대 바다의 물빛처럼 푸른
투명 아크릴 터널을 통과하여 천천히 상승하는 동안
내 마음에 기억 하나가 떠올라 왔다.
아이들이 어릴 적 홍콩에 갔을 때
꼭 이렇게 야외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탔던 순간이..
그때 올망졸망하던 아이들은
엄마의 다리 언저리에 꼭 붙어 서있었는데..
시간도, 에스컬레이터도,
내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제 나름의 속도로 진행되어 간다.
에스컬레이터는 2단으로 되어 있었다.
첫번째 에스컬레이터의 끝부분에 이르자
둥근 출구 너머로
산중턱에 자리잡은 건물들이
좀더 가까이 다가들어 보였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좁다란 마당을 걸어가
두번째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리조트가 자리잡은 이곳은 사동이고,
도동항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거리이다.
한적하고 경치가 좋지만 교통이 불편해서
리조트에서 도동항구까지 이른 아침과 밤에 한 번씩
운행하는 셔틀 버스 말고는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도동에서 리조트까지 기본 택시비는 4,000원이고
리조트에서 콜택시를 부를 경우엔 7,000원을 내야 한다.
방과 욕실은 깔끔했다.
발코니에서 사동 앞바다의 풍광이
시원스레 내려다 보였다.
짐을 풀어놓은 후
저녁을 먹으러 호텔 본관으로 내려갔다.
올라올 때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 있어서
내려가는 길엔
촉촉히 습기 머금은 저녁 바람을 맞으며
저무는 풍경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동백나무와 마가목, 향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진초록의 여름 숲이
엷은 어둠에 잠겨가고
멀리 일찍 눈 뜬 가로등 불빛이 아름다웠다.
머나먼 섬에서 맞는 저녁은
낯설고 호젓해서
나는 풀잎 끝에 앉은 여치처럼
마음의 더듬이를 조심스레 내밀어
영혼으로 스며드는 고독한 설레임을
서투르게 감지했다.
오렌지빛 등불의 광휘에 휩싸인 본관은
마법의 성처럼 화사해 보였다.
모든 매혹의 실체가 그렇듯,
뜯어보면 별다른 점도 없었지마는..^^
본관 로비 옆에 달려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방을 구하느라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구입했더니
저녁과 다음날 아침 식사는 이곳에서 하도록 되어 있었다.
저녁 메뉴는 선택의 여지없이,
밥과 국, 나물을 포함한 몇 가지 반찬의
조촐한 한식 차림이었다.
크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맛!^^
어둠이 가시고
새벽빛 속에서 제일 먼저 잠을 깨었다.
식구들의 숨소리에 섞여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물소리가 들려왔다.
살그머니 일어나 커튼을 열어 보니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온통 잿빛으로 젖어 있는 풍경..
어둡고 축축한 지붕 너머 저멀리
해안 절벽 아래로 모여들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눈길을 끌었다.
비는 내리지만 빗줄기는 아주 고요했고
바람과 물결도 잔잔해서,
나는 그토록 멋지다는
울릉도 해상관광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새로 열릴 하루를 위해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짐을 꾸린 후 방을 나섰다.
우리가 묵었던 106동 건물,
하얗게 칠해진 나무 포치를 나서노라니
언제 다시 와볼 지 모른다는 비감함이 스쳤다.
마음이 감상에 빠지는 걸 경계하며
밝은 쪽을 향해 경쾌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아침햇살이 퍼지면서 비는 잦아들었지만
이미 좋지 않은 소식이 하나 들어와 있었다.
성수기 동안 포항과 울릉 간을 하루 두번씩 오가는 썬플라워호가
지난밤 기상 상태가 나빠 포항에서 출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밤에 들어왔어야 할 배가 안 들어왔으므로
새벽에 그 배를 타고 나가야 할 손님들이 모두 발이 묶인 셈이다.
울릉도에는 섬에 들어온 순서대로 다시 뭍으로 나간다는 불문율이 있다.
앞의 배 손님들이 먼저 나가야 우리 차례가 오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직장엘 나가야 하는 남편에게 차질이 생겼고,
다음 배가 언제 들어올런지도 기약이 없어
마음이 산란해졌다.
게다가 한창 성수기라
갑작스레 우리가 묵을 방을 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우선 아침 먹으러 내려가
프론트에서 숙박을 연장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축축히 젖은 대나무숲 너머로 내려다 뵈는
호텔의 야외 수영장이 아쿠아마린 파란 보석처럼 고왔다.
아이들에게 수영복을 준비해 오라고는 했는데,
워낙 시간이 없어
수영장을 이용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성수기라 빈 방이 없었는데도
막상 리조트 안은 매우 한적해서
다른 손님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비에 젖어 더욱 고즈넉한 정적 속에서
함초롬히 젖은 풀잎들만 처연히 반들거렸다.
그래도 가족이 다함께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바람의 축축한 지느러미가 살갗에 서늘하던 길모퉁이..
하룻밤 더 묵을 수 있을까 조바심하며
그곳을 떠나왔다.
프론트에 알아보니 예약을 연장하기는 불가능했다.
다른 손님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울릉도에서 구할 수 있는 숙소는 대아 리조트 외에
호텔과 모텔, 여관과 민박이 있는데
호텔들은 낡고 시설이 안 좋아서 여관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새로 지은 모텔 2~3개가 여관보다 좀 더 깨끗하다는데,
아무튼 여행사 쪽에서도 적당한 숙소를 알아봐 주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한식 뷔페 스타일로 차려져 있었다.
밥과 마음에 드는 반찬, 국을 가져와서
아이들과 가벼운 얘기를 나누며
가족이 함께 하는 행복감을 살뜰히 누렸다.
반찬의 맛이며 질은, 저녁 때와 마찬가지로
크게 맛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트집잡기도 힘든,
아주 평범한 수준이었다.^^
아침 여덟시 반까지 도동항의 큰 나무 아래로 가
여행사 직원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콜택시를 불러놓고
호텔 정원의 마가목 그늘 아래에서
울릉도 특유의 사륜구동 택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전까지는 관광 일정이 짜여 있지만
오후부터는 배편이 결항되어 생긴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이어서
우선 숙소를 확보한 후
우리끼리 가능하면 알차게 보내야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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